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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라는 편견을 걷어버린다. 나는 나다

기사승인 2019.07.08  16: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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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경영가 임지윤

   
▲ 뉴욕 브로드웨이 슈베르트 극장(Shubert Theatre) 앞에서. ◉사진제공. 임지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게 조용히 묻어두고 지내는 게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던져질 냉담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본성 아닐까? 더군다나 자신이 가진 ‘소수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내면의 방어막은 더욱 더 단단한 벽으로 울타리를 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아니란다. “상관없어요. 감출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 모두가 저의 한 부분 한 부분이니까,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저의 생각이거든요.” 그 당당함이 그를 이 세상 한가운데로 이끌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젊은 청년 임지윤 씨가 독자 여러분께 인사를 전한다. “자신만의 인생을 사세요. 한 번뿐이니까요.”라고 말이다.

 

# Scene 1 – 장면 하나

“사실 전공은 열아홉 살 때 생각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교육방침에 따라서, 열아홉이 되면 전공을 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잖아요. 전공은 직업을 찾다가 선택했어요. 하우스 매니저라는 직업이 제 가슴에 확 와 닿았거든요. 연출은 공연 안에서의 부분을, 기획은 공연 밖에서 마케팅, 홍보, 예산, 지원 같은 걸 담당해요. 극장 안에서 관객들과 만나면서 안내하고 진행을 맡는 책임자가 하우스 매니저인데, 제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공연도 좋아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 같아요. 좀 늦게 진로를 정했지만, 그래도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들었으니까요.”

임지윤 씨는 ‘제가 공부 쪽으로는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라며 사족을 달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의 꿈이 선생님이었을 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했단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하는 신체적 자세가 힘들어져서 공부를 놓게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두 팔 모두 팔꿈치 아래로 기형이에요. 선천성으로 팔 길이가 짧고, 원래는 양 손목이 안쪽으로 90도 굽어 있었어요. 몇 년 전부터 수술을 거듭하면서 180도로 펴게 됐고, 제가 원래 엄지손가락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검지를 엄지 자리에 이식하는 수술을 해서, 지금 이렇게 손목과 손에 수술자국이 많이 남아 있어요. 짧은 팔로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 하니까, 상체가 계속 앞으로 숙여지면서 갈비뼈가 장기를 누르는 게 반복됐죠. 중학교 때까지는 견딜 만했는데,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는 적응이 안 될 만큼 힘들어지더라고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데도 몸이 안 받아주니까, 이게 계속 부딪치는 스트레스의 연속이 됐던 거예요.”

팔꿈치 아래부터 손목까지 연결되는 뼈가 두 개 있는데, 그는 엄지를 관장하는 뼈 하나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단다. 검색을 통해 확인해 보니 Ulna라는 척뼈(骨)와 Radius라는 노뼈(骨) 이렇게 두 개의 뼈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뼈 하나만으로 태어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는 살아오면서 자신의 장애 때문에 뭔가를 주저하거나 내려놓았던 적은 없었단다. 그래서 공부를 놓게 된 게 못내 미련으로 남는다 싶은 눈빛이었다.

“연극을 좋아하게 된 건 제 가치관 때문이에요. 사람은 자기 인생을 한 번밖에 못 살잖아요. 그런데 영화와 달리 연극은 훨씬 더 생생한 느낌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되고, 제가 정말 그런 인물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할 수 있게 되거든요. 다른 위치와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회가 주어지니까, 제게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연극이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보통 ‘한예종’이라 부르는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대한민국 예술계의 미래들이 모두 모여 있는 국립대학이다. 임지윤 씨는 한예종의 연극원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이고, 연극원 연출과를 부전공한 예비 전문가다. 몇 차례 휴학을 하는 바람에 스물여섯의 나이로 올해 8월에 졸업을 한다며, 그는 사회로 진출하는 나름의 각오를 단단하게 내비쳤다.

   
 

“학교에 다니면서 공연을 계속 기획하고 무대에 올렸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학교에는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었어요. 극장은 이미 있고, 배우들은 연기과 배우들이 있고 연출과도 따로 있으니까 다 갖춰진 상태에서 기획만 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졸업을 준비하면서 밖으로 나가 몇 번 작업을 하다 보니까, 학교 울타리 밖은 환경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모든 걸 다 하나씩 섭외하고 조율해야 한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그런 세세한 체험을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좋은 시설과 지원 속에서 학교생활을 했는지가 새롭게 확인되는 거죠.”

집안에선 늦둥이라서 언니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대학에선 바로 위아래로 선후배들이 있어 너무 좋았단다. 장애에 대한 편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느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함께 공연을 만들며 지낸 대학생활이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그는 몇몇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졸업 후의 준비는 다 됐느냐고 물으니, 그는 결론부터 언급했다.

“제 이름을 걸고 극단을 만들 거예요. 더 나아가선 극장도 만들고 싶어요. 무대활동에 장애가 융합된다면 가장 좋겠죠. 연극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도 포함할 거예요. 제가 지향하는 목표는 ‘Art Management(예술경영가)’이니까요.”

 

# Scene 2 – 장면 둘

임지윤 씨는 대학시절 가장 기억 남는 순간으로, 해외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6명이 한 조를 이뤄 하나의 주제를 정해 외국 현지에서 체험하고 확인하는 프로젝트에 선발된 건데, 그가 속한 조는 국내 장애예술 활성화를 위한 주제를 가지고 미국 뉴욕과 워싱턴DC를 탐방했단다. 장애인극단과 장애를 가진 아티스트, 장애인의 예술 향유를 위해 일하는 여러 기관들을 방문하고 인터뷰하며 7박8일의 일정을 가득 채웠는데, 귀국하면서 얻은 결론은 딱 한 가지였다고 한다.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거예요. 현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게, ‘굳이 장애를 나눌 필요가 있는가?’ 하는 반문이었죠. 그냥 여러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고, 그 사람한테 맞게 예술을 경험하고 향유할 방안을 마련하는 게 전부라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지나가면 열의 아홉은 다 쳐다보죠.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는 너, 나는 나’ 그리고 ‘각자는 세상의 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죠. 그들의 그런 인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임지윤 씨는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자신’을 언급했다. 굳이 가릴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고 했다. 왜냐,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게 그냥 일반화돼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엄청나게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게 보편화돼 있고요. 저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서 아무런 인식도 없이 지내왔던 거죠. 단지 남자친구들보다는 여자친구들과 더 자주 많이 어울렸던 것 같고, 어릴 때부터 ‘저 친구랑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다 우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떠오른 거예요.”

   
 

‘왜 이런 거지?’ 하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면서, 그제야 그는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보게 됐단다. 성(性)에 눈을 뜨면서 사춘기 때 남들 다 한다는 연애? 하지만 남자친구들은 있어도 그저 친구들일 뿐, 이성(異性)으로서의 마음은 한 번도 생겨나지 않았단다. 남자를 특별히 기피하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냥 친구로 존재했을 뿐, 그는 여자친구들과 지내는 게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거예요. ‘내가 이상한가? 내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내가 생각을 바꿔야 되는 건가?’ 그런 내적인 갈등과 의문에 휩싸일 때, 우연히 한 포털사이트 카페를 발견하게 됐어요. 들어가서 글을 읽고 얘기 나누는 걸 살펴보게 됐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고, 그때부터 저의 성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스스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이 사회에선 ‘성소수자’라고 낙인을 받아야 하는, 그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는 뜻이 된다.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던졌던 물음표들이 그때부터 하나의 느낌표로 다가왔고, 그는 모든 현실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됐단다. 새롭게 자아를 인식하면서 모든 게 자연스러워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 한 구석엔 불편한 고민 하나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통 ‘커밍아웃’이라고 하는 과정, 세상 전체에 내보일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제 성격상 뭔가 거짓말을 하는 건 불편해서,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쌓여갔는데 타이밍(시점)이 발목을 잡았죠. 어느 정도 일을 하고 독립한 뒤에 말씀드리겠다고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이랑 저녁에 술 한잔 하게 된 어느 날 갑자기 털어놓게 됐어요. 연세가 많으시고 보수적인 지역 정서를 따르는 분들이셨는데…, 그런데 이미 눈치를 채고 계셨대요. 이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제가 더 감동이 되더라고요. 집에 계속 여자친구가 놀러오고 카톡 프로필 사진도 늘 함께 찍은 영상들이었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님께선 감을 잡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정말 뜻밖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신거죠. 그 이후로 부모님은 제 ‘애인’과 식사도 같이 하면서 잘 지내세요. 그게 가장 커다란 응원이 됐는지, 지금은 제 주변 사람들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그 또한 저의 정체성이니까 굳이 가려둘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게 제 삶의 모습이니까요.”

 

# Scene 3 – 장면 셋

젊음의 힘 때문일까 싶었는데, 임지윤 씨는 정말로 장애에 대한 ‘스스로의 편견’이 없었다. 연극을 비롯한 예술 분야에 미래의 꿈을 꾸고 있을 수많은 후배들에게 한마디 남겨달라고 했더니, 그는 대선배의 입장이 됐을 때 언급할 만한 내용의 화두를 툭 꺼내놓았다.

“장애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음악을 좋아한다면, 그건 저를 설명하고 소개하는 사실 중 하나잖아요. 장애도 그런 저의 모습 중 하나인 거예요. 그냥 일부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후배들한테 꼭 전하고 싶은 건, 장애 때문에 고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어떤 일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일 때문에 고민해야지, 그 고민의 전제 안에 장애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건지, 어떤 목표를 세우고 어떻게 달성해 나갈 건지, 고민은 거기에만 집중해도 모자라는 거예요.”

   
▲ 2016년 미국 연수 당시,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학교 후배가 즉석에서 그려준 캐리커처 그림과 함께 ◉사진 제공. 임지윤

지금 장애인식개선강사 교육과정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임지윤 씨. 이제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하면, 그의 날갯짓은 그 누구보다 크고 넓게 펼쳐질 것 같다는 믿음이 든다. 아주 뚜렷한 자아관(觀)을 가진 젊은이를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인연이기 때문이다.

“보통 어렵다는 기준을 비율로 따지잖아요. ‘어디는 경쟁률이 십대일이고 어디는 백대일이다’라는 식으로요. 후배들이나 청소년 친구들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 자기 앞에 놓인 경쟁률 때문에 고민과 갈등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 생각은 다르거든요. 백대일이든 천대일이든 간에, ‘되느냐 안 되느냐, 붙느냐 안 붙느냐?’로 바라봐야 한다는 거예요. 열심히 해서 안 되면 더 열심히 해서 붙고 합격하는 걸 목표로 해야지, 비율에 먼저 겁을 먹을 필요가 없는 거죠. 저는 이 말을 꼭 강조하며 전해줘요. 그래야 도전할 마음다짐이 확고해지니까요.”

대화를 마무리할 무렵, 임지윤 씨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밝혀놓고 싶다고 했다. 앞선 고백과 마찬가지로, 굳이 가려둘 필요가 없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털어놓으려 하는 걸까?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헤아려 보니, 그는 이 기회를 통해 그 모든 굴레 전체를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글의 정리를 마치며 드는 마지막 생각은 그게 정답이리라는 확신이다.

“작년 시월에 처음 듣게 됐어요. 제가 입양됐다는 사실…, 솔직히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날도 가족 식사자리에서 아버지가 갑자기 말씀을 꺼내셨어요. 어머니는 더 나중에 말하고 싶으셨다는데…. 기록상으로는 제가 태어나고 보름 만에 보육원에 들어갔대요.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시던 어머니가 저를 아껴주셨고, 가족체험 프로그램 때 저를 집에 데려와 며칠 동안 키우면서 입양을 결정하셨다고 해요. 삼 개월 만에 가족으로 맞이하셨고, 그래서 저는 돌사진도 있어요. 아직까지는 백 퍼센트 마음이 안정된 건 아니지만, 그동안 키워주신 데 더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입양이면 무조건 해외입양이고 더군다나 장애아를 국내입양 한다는 건 당시 첫 사례였다고 해요. 모든 걸 떠나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것도 저의 모습인 거죠. 이젠 제 삶으로, 제 인생으로 완성되는 길만 남은 거예요.”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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