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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될 때까지 평생 기타를 치려고요”

기사승인 [369호] 2019.11.13  14: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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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시선]지적장애인 기타리스트 김지희

 

   
 

김지희 씨는 빨간 외투에 기타를 매고 카페에 들어섰다. 옷 색깔이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려서일까. 20대 젊은 여성이 입은 빨간 외투와 등 뒤의 기타는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 옆에 있던 어머니 이순도 씨가 먼저 인사했다.

지적장애인 기타리스트로 알려진 김지희 씨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관련 일정으로 바빠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영화에서 얼굴을 익힌지라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기표현을 쉽게 하지 않는다. 어머니 말로는 지적장애로 사용할 수 있는 어휘의 개수가 적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을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는 편이라고 했다. 인터뷰는 어머니 이순도 씨가 함께했다. 가끔 질문에 대답하는 김지희 씨의 목소리는 작고 고왔다.

 

여섯 살에 겨우 입을 뗀 ‘엄마 아빠’

김지희 씨는 남들보다 일찍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39세가 되던 해 임신한 늦둥이다. 만혼과 늦은 출산이 요즘에는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흔하지 않은 만산(晩産)이었다. 지희 씨 위로는 8살 많은 언니가 있다. 전치태반(태반이 자궁경부 안쪽에 착상된 것)으로 임신 5개월째부터는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7개월 반이 됐을 때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응급수술로 지희 씨가 태어났다. 2.2kg. 매우 작았다. 20여 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지내며 거의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보기엔 힘이 없어서 우유도 조금만 빠는 것 같았다.

일찍 태어난 지희 씨는 말이 늦었다. 네 살 반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 엄마 눈을 마주쳐야 말도 배울 수 있을 텐데, “엄마 여기 있어. 여기 쳐다봐” 수만 번 말했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못하던 그녀가 어려운 드라마 OST를 흥얼거리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반갑기보다는 걱정이 됐다. 의학대전을 찾아보니 다운증후군이나 자폐성향이 있는 아이들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써 있었다. 놀란 가슴을 안고 병원을 찾았다. 검사결과 다운증후군은 아니었다. 자폐 여부는 여섯 살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했다.

여섯 살이 되어서야 “엄마, 아빠”라는 말을 시작했다. 유치원에 가서도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울고 돌아오는 날이 태반이었다. 결국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 앞에 있는 언어치료실에 다녔다.

 

학교라는 굴레

지희 씨는 초등학교 내내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특수학교로 보낼지 잠깐 고민했지만, 비장애학생들과 있으면 친구도 사귀고 사회성도 생길 것 같아 일반학교를 보내기로 했다. 집 근처 200m 이상을 혼자 못나가는 지희 씨의 상태를 고려해서 집 근처 학교로 보내고 싶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어머니의 고민은 커졌다. 대부분 남녀공학인 중학교에서 딸이 어떤 일을 겪을지 몰라 불안했다.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는 학교에 보내는 게 중요했다. 아파트 앞 중학교에 보내려면 장애인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장애판정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 사회성과 아이큐가 낮아 정신지체 2급이 나왔다. 의사는 더 이상의 (인지능력) 진전은 없을 것 같으니 다시 검사를 받으러 올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회성이 적은 그녀에게 과도한 두려움이 표출되곤 했다. 천둥번개만 쳐도 베란다 문을 잠그는 것으로도 부족해 자기 방문을 잠그고 귀를 막고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집 앞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처럼 일반중학교에 다닌다고 사회성이 생기거나 친구를 사귀는 건 아니었다. 통합학교의 운영상 학교 수업 중 반은 통합반(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수업받는 반)에서 수업을 받고, 나머지 수업의 반은 도움반(특수반)에서 받는다. 지희 씨는 도움반에서는 반장도 맡고 다른 아이들도 돌보고 곧잘 의사표현도 하는데, 비장애학생들과 같이 수업받는 반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위축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지희 씨가 콩쿠르에서 1등을 해서 어머니는 지희 씨 반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하는 친구들도 위로할 겸 빵을 사서 학교에 갔다. 교실에 도착한 어머니가 지희 씨를 보고 교실에 들어오라고 손짓했는데도, 그녀는 바로 들어오지 목하고 머뭇머뭇하는 게 아닌가. 자기 교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학급에서 외롭게 있었을 그녀의 학교생활을,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서 하루종일 졸거나 멍하니 견뎌야 하는 그녀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움반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나마 괜찮겠지만, 나머지 시간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그녀에게 학교생활이 어땠냐고 물었다.

“학교 다니는 건 힘들었어요. 수업시간은 많이 졸립고….”

지희 씨에게 다시 물었다. 왜 어머니에게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녀는 짧고 명확하게 답했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요.”

어머니는 의무교육인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함께 여행을 다니자고 했다. 딸의 마음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기타를 배우면서 지희 씨의 20대 생활은 어렴풋한 그림과 완전히 달라졌다. 기타를 만나고 그녀의 삶에 기적이 일어난 듯했다.

 

희망을 전하는 기타리스트 김지희

지희 씨는 집에서 천사로 불렸다. 설거지며 청소며 집안일도 곧잘 도왔다. 공부와 피아노 레슨으로 피곤해 할 동생을 위해 동생 방을 치울 때도 종종 있었다. 대학생인 여동생은 피아노가 전공이다. 부모는 언제나 밝게 웃고 집안일도 돕는 둘째딸이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랐다. 인지능력이 떨어져 공부가 어려운 지희 씨에게 부모는 공부하라고 다그치거나 추가 수업도 시키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2 때까지 미술학원을 다녔다. 개별학습실 선생님이 지희 씨가 색감도 좋고 색칠도 꼼꼼하게 하니 그림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권유했다. 지금도 가끔 그림을 그린다. 짱구를 비롯한 캐릭터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기타는 고등학교 때 배웠다. 기타 코드 몇 개를 배워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면 아이가 활발해지지 않을까 하는 아버지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어느 날 지희 씨가 유투브에 나와 있는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 정성하 씨의 연주를 보고 달라졌다.

“엄마, 나 이거(핑거스타일 연주) 가르쳐 줘.”

도레미파도 모르는 딸이 연주를 배우고 싶다는 말이 신기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동생의 악보를 보고 “엄마, 쟤는 어떻게 저렇게 어려운 걸 쳐”라고 묻던 아이였지만 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지원하고 싶었다. 핑거스타일 기타 연주는 현을 뜯고 두드리며 멜로디, 박자, 화음을 내는 주법이라 어렵다. 그래서 어머니는 학교 앞에 있는 학원에 찾아가 선생님께 딸의 장애를 설명하고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도 흔쾌히 승낙했다. 지희 씨가 오선지에 그려진 악보는 못 보지만 기타에는 또 다른 타브(TAB) 악보가 있으니 시도해 보겠다고 했다. 타브 악보는 기타 여섯 줄에 손가락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를 그린 숫자로 된 악보다. 처음엔 어머니가 선생님이 연주하는 영상을 찍어오면 그걸 보고 그대로 따라하며 연습했다. 지금은 타브 악보를 잘 본다. 물론 어려운 곡은 외우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다 그녀에게 공연과 상복이 터지는 일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공연 무대에 올리는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2012년 TJB대전방송에서 개최하는 ‘전국장애학생 음악콩쿠르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기타를 배운 지 겨우 6개월 정도라 상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금상을 수상했다. 놀라운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김지희 씨의 삶과 음악을 다룬 다큐를 2편이나 제작했고, 급기야 2013년 2월 5일 평창 동계 스폐셜올림픽 폐막식 성화소화타임에 전 세계인들 앞에서 독주까지 했다. 마침 그날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어서 지희 씨는 더 기뻤다고 했다.

그 후 지희 씨의 롤모델인 기타리스트 정성하 씨와의 듀엣 공연 요청도 왔다. 팬인 그녀에겐 기적같은 일이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밤새워 연습했다. 그 후에도 여러 콩쿠르에서 수상했고 그녀의 일상을 다룬 다큐 영화도 제작됐다. 해외공연 요청도 많아졌다. 매일매일이 바쁘고 새로워졌다.

 

   
 

 

7년여 시간, 500회가 넘는 공연

기타를 배우고 7년 동안 5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그녀는 기타를 치면 마음도 좋아지고 노래도 부르니 즐겁다고 말했다. 대답을 들으니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타를 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타를 치기 위해 뭘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답했다.

“준비하는 건 별로 없고요, 꾸준히 배우고 있어요. 그냥 기타를 꾸준히 치고 싶어요.”

우문현답이다. 그녀는 미국 LA에 초대받아 혈액암 환자를 돕는 공연을 몇 년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는 전국의 학교를 순회하며 장애이해교육으로 희망을 전하는 스토리텔링 콘서트도 하고, 병원 로비에서 환자들을 위한 음악회도 한다.

그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두려워서 허리도 못 펴고 코가 거의 기타에 닿은 상태로 연주했다. 공연 횟수가 늘어날수록 연주를 마친 후 인사도 하고 웃기도 한다. 달라진 모습이다. 어머니는 기타 연주가 그녀의 인지능력을 높였다면, 공연은 그녀의 자신감을 키운 것이라 분석했다.

“지희에게 음악이 의사였어요. 하루 종일 기타를 갖고 놀았어요. 재미있어서 기타에서 손을 안 놓는 거예요. 그러면서 스스로 성장한 거지요.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어요. 초중고 통합반 아이들 앞에서 한마디 말도 못하던 아이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여러 무대에서 공연하면서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전혀 움츠려들지 않고 당당하게 연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게다가 지희가 전문 연주자는 아니지만 연주하면서 스스로 행복해하고 그 행복이 다른 장애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보람이 있어요. 지희의 공연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지희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어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듣던 지희 씨는 “아픈 기억도 나고 힘들었던 기억도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짧은 웃음과 함께 그녀는 최근 연습 중인 곡을 들려줬다. 선율 하나하나가 카페를 가득 메우더니 포근해졌다.

희망을 전하는 건 말이 아니구나! 그녀의 어머니 말마따나 연산 능력은 아직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이지만 그러면 어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기타로 남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는데! 인지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란 얼마나 편협한 세상인가. 노래처럼 자유로운 세상을 상상해본다. 음악 자체로 사람을 위로하는 것처럼, 편견 없이 장애인들도 자유로이 꿈의 나래를 펴길 꿈꿔본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가 멀리멀리 퍼지기를 바란다.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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